Artist
Song, Feel




조각의 무게, 무게의 조각
“나에게 취미가 있다면,
땅이나 돌들에 대한 것뿐.
나는 언제나 공기, 바위,
석탄, 철로 점심을 때운다.“
-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중에서
- 정현 (미술비평)
송필의 작업이 지금과 같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민을 담기 시작한 건 중국 베이징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부터였다. 이전에도 사회적 문제를 다루었지만 당시에는 다양한 질료와 기법을 사용해 조각에 관한 형식적 실험을 바탕으로 한 관념적인 접근이 보다 눈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사적 고민에서 공적 문제에 대한 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구겨진 고층 빌딩을 재현으로 구체화된다. 모더니티의 이상은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실현시킴으로써 완성되었고, 이 욕망의 높이만큼 인간의 자긍심도 함께 끝없이 위를 향해 올라갔다. 2007년은 금융자본주의의 한계가 드러나던 시기였고, 세계 증권가의 몰락은 초자본주의를 향한 인류의 염원도 함께 무너지던 때였다. 당시 송필은 정형화된 조각 작품을 선보이기보다 조각적 기술을 바탕으로 연극적 무대를 제시하려 했다. 별 문양이 조명과 슈퍼 히어로의 망토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좁고 높은 좌대에 위치한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은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높은 곳에서 현실을 관조하기만 하는 예술가/사상가의 위치를 묻는 것만 같다. 이 같은 극적 구성은 자본주의에 대한 직설적인 풍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마도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비유였을 것이다. 예술가의 삶과 경제적 현실은 분리될 수도 그렇다고 밀착되기도 어려운 관계이니 말이다. 반 기념비적 빌딩 연작은 2011년 이후 동물 연작으로 옮겨간다. 동물 연작은 작가가 발견한 실제 돌을 이용해 낙타, 사슴, 캥거루, 버팔로 등과 같은 동물의 형상을 접목한 작업이다. 무표정한 동물들이 네 발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풍경의 원소이자 문명의 기원처럼 보이는 묵직한 돌이다.
정경(情景)의 조각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은 자연을 모방해 진리를 추구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쉽게 말하지만 막상 이 진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사람들은 이상향으로서의 자연을 좇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완벽한 자연을 만나기가 점점 더 어렵다는 점이다. 지구의 자연은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고 개척자들은 극한 자연을 점령한 후 문화적 자원으로 재활용하기 때문이다. 예술과 자연이 맺던 경쟁관계는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하다. 개발이 불가능한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늘의 자연과 자연의 이미지는 원래 존재하는 모습이 아닌 인간이 원하는 모습을 취한다. 자연이 사라진 이유는 자연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기보다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이 야생의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이처럼 문명화된 자연은 영화의 배경으로, 미디어 매체의 병풍처럼 주변부에 머문다. 원래 서양에서 풍경의 정의는 인공화 된 자연을 뜻한다. 이는 곧 인간의 의지로 만든 세계를 재현해야 한다는 명제와 다름이 없다. 즉 예술이 자연의 상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한 자연에 대한 존경심은 자연과 예술의 만남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중국계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와 쳉은 자연 본연의 모습을 발견한 예술가로 세잔을 손꼽았다.
“세잔의 작품에서는 아름다움이 모든 차원의 만남으로 형성됩니다. 자연의 차원에서는 감춰진 것과 드러난 것, 움직이는 것과 고정된 것의 만남이, 예술가와 관계되는 차원에서는 터치와 색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조화 위에서 인간의 정신과 특정 순간의 풍경이 만나게 되며, 마치 예술가가 포착하여 보여준 것을 품어 안을 줄 아는 방문객을 맞이할 채비를 하는 것처럼 여기에서는 떨림을 일으키고 울림을 주는 미완성 상태의 무언가가 동반됩니다.”
그렇다면 예술가란 자연을 만드는 자일까, 아니면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자일까? 미술의 전통은 오랫동안 예술가가 만든 자연의 전형을 답습하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현대미술의 탄생이 이른바 관습화된 미술이 아닌 현재형의 삶과 소통하려는 의지에서 발현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오늘의 미술은 소통 자체가 하나의 관습으로 대체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현대 사회의 단절을 전제로 한 동시대 미술은 의도적인 소통을 기획하려는 경향을 강조한다. 그러다보니 예술가의 역할이 정치가와 흡사해지고, 그래서 미술 역시 정치가의 웅변처럼 공허하기만 한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작가는 미술의 공허함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최근 들어 그는 텃밭을 가꾸면서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산다고 말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의 작업이 자연을 만들기보다 자연에 다가가려는 실천의 몸짓처럼 느껴졌다. 정경(情景)이란 단지 시각적으로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감상이자 자연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 맺기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문명(예술)과 자연의 관계는 더 이상 경쟁 상태는 아니다. 지구 환경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우리의 미래이다. 요셉 보이스의 <오크나무 프로젝트>가 시사하듯, 자연은 시간에 따라 성장하는 생명이며, 표지석으로서의 비석은 시간을 뛰어넘는 기념비와 같다. 기념비의 시간은 고정되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다. 보이스의 가르침은 예술의 영원성이 아니라 자연의 생명력이었다. 시간이 흘러 비석보다 훨씬 커 버린 오크나무의 모습은 뭉클함마저 선사한다. 스스로 성장해 과거에서 현재로 성장하는 모습은 감상적인 차원의 희망적 미래가 아닌 자연이 가진 위대한 힘을 알려 준다.
무게의 조각-또 다른 리얼리즘
전통 조각은 인물의 표정보다 신체의 표현에 더 많은 고민을 한다. 감정이 나타나는 것도 표정보다 신체의 자세에 의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송필의 조각은 전통 조각과 유사하지만, 표현에는 차이가 있다. 동물 조각은 역동적인 움직임도, 웅장한 자세도 취하지 않는다. 동물은 자기 몸보다 거대한 돌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진하는 모습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지한 모습에 가깝다. 마치 돌에서 신체 기관이 가지를 뻗은 것처럼 보인다. 나무를 이고 있는 양(Looking for Utopia, 2014)은 동식물의 혼종이고, 신던 신발들의 봉오리를 이고 있는 낙타(Walking, 2014)는 문명의 잔해를 싣고 사막을 횡단하는 ‘운명의 수레’를 연상시킨다. 이름 없는 자들의 삶을 기념하듯 의젓하게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처연하다. 폐기물로 만들어진 신체는 후기 산업사회의 묵시록적 미래를 보여주는 공상과학소설의 괴물과 닮았다. 프랑스의 누보 레알리즘은 후기 산업화를 비유하기 위해 순수한 질료가 아닌 대량 생산된 산물을 작업의 질료로 삼았다. 이탈리아의 아르테포베라 작가들은 조각을 하지 않은 상태의 대리석 자체를 활용해 조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했다.
알다시피 고전주의 리얼리즘 조각은 회화와 마찬가지로 착시를 요구했다. 조각은 가장 완벽한 인간상을 재현했고 이 형상들은 언제가 중력의 무게를 이겨내고 곧추 선 모습으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좌대 위에 그 존재를 드러내었다. 여기서 나타나는 착시 현상이란 질료가 가진 본래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허버트 리드에 따르면 “조각물이 마치 움직이는 듯이 보인다”고 말한다. 조각은 근대 리얼리즘에 이르러 생동감과 역동성은 더욱 풍부해진다. 리드는 이러한 변화를 예술가들이 리얼리티를 자각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여전히 예술 속에 주술적 믿음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반대로 현대 조각의 실험은 의미를 지닌 형상이 아닌 물질 자체의 가능성과 질료와 공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송필의 작업은 분명히 재현을 통한 리얼리즘의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가공하지 않은 자연의 돌과 실제 오브제의 사용은 재현의 의미보다 오히려 리얼리티(현실)를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재현을 통해 기호학적 의미를 드러내기보다 원 재료가 갖는 실재성, 무게, 질감, 냄새가 리얼리티의 기제이기 때문이다. 송필의 수려한 조각술과 리얼리티의 만남이 순수 조각의 세계 안에서 새로운 유형의 리얼리즘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