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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Oh, Se-yeol

기억의 층위

오세열

 

오세열의 화면은 모노톤에 지배된다. 그런 만큼 평면화가 두드러 진다. 화면에 등장하는 이미지나 흔적들은 이 평면의 질서에 상응하면서 가까스로 자신을 가눈다. 평면화가 두드러지면서도 단순한 평면으로 보기엔 중후한 마티에르의 층위가 평면의 구조화로 진행된다. 평면이 단순한 넓이의 표면이 아니라 깊이로서의 구조를 아울러 띤다. 이 점은 일반적인 모노톤의 평면과는 다른 특징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의 경향으로서 등장한 한국의 단색화와 일정한 차별화를 띠는 것도 이 점에서 기인한다.

 

천으로 이루어진 캔버스보다 딱딱한 나무판이 지지체가 되고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의 화면의 특징이다. 마치 아이들이 길바닥에나 벽에다 낙서를 하듯 그도 딱딱한 화판 위에다 긋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고 그리다 그만두기도 한다. 얼마쯤 그의 화면은 현재 진행형에 가깝다.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 어쩌면 끝나지 않은 순간이야말로 그의 화면이 보여주는 여운이다. 적지 않은 화면이 칠판을 연상시킨다, 딱딱한 칠판 위에 글자를 쓰고 숫자를 쓰고는 채 지우지 않은 상태로 교사가 교실을 떠날 때 아이들이 몰려서 칠판에다 제각기 교사의 흉내를 내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마치 자신들이 선생님이나 된 것처럼 뽐내던 그 잔잔한 긴장이 아련한 물결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그의 화면이 보여주는 포화된 마티에르의 정감은 반유채화(反油彩畵)의 한 단면을 이루면서 한국의 현대미술에 나타나는 독특한 특성에 닿아있다. 유화가 지닌 질감의 기름기가 걸러지고 마치 퇴락한 옛 기물을 대하는 것 같은 푸근함으로써 말이다. 한국의 일부 화가들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이 같은 공통된 특성은 유화라는 서양의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자신들의 정서로 걸러낸 독특한 방법의 고안이다. 동아시아로 들어온 서양의 회화 방법은 지역에 따라 다른 수용과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유채적 정감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기법이다. 이 같은 기법은 화면에서 추구되는 내용과는 상관없이 공통된 것으로 나타난다. 즉 구체적인 이미지를 지닌 경우이거나 순수한 추상의 화면이거나 상관없이 말이다. 따라서 오세열의 화면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는 대표적인 화가로서 박수근의 화면에 보이는 반유채적 정감과도 상통되는가 하면 일련의 단색화 작가들의 무채(無彩)에 가까운 반유채적 질감과도 상통되는 점을 보인다. 이 점에서야말로 그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의 조형화에 근접해 있을 뿐 아니라 구상이나 추상의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그 고유함을 지닌 작가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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