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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Jung, Boc-su

욕망, 그 숙주로서의 신체

유근오 | 미술평론

 

누군가가 속삭인다. `난감하다. 이게 환청이지. 그림 속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런 감성적 음색의 청취는 정복수의 전시를 본 어느 감상자가 필자에게 은밀히 밝힌 소감이다. 그림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시공간을 넘어 청각의 영역까지 넘나드는 것이니 이런 공감각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기도 하다. 전시를 본 여느 감상자라도 그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음은 틀림없다. 음모도 없이 덜렁 드러낸 채 발기되고 까발려진 남녀의 성기에서 작품을 휘돌고 있는 역겨운 관능의 냄새를 맡았을 수도, 잘려나간 연분홍색 신체들이 뒤엉켜 자아내는 기묘한 형상의 의미를 곱씹었을 수도, 오장육부를 드러낸 동양의학의 경혈도를 닮은 무표정한 신체의 실루엣을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그가 창조해낸 인물의 페르소나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수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각기 다른 양상이 혼재하는 느낌이겠지만, 어쨌든 그의 신체들이 펼치는 원초적인 욕망과 본능의 몸짓이 뇌리에 각인되었음은 틀림없다. 

 

이를테면 그 인상은 소위 망막을 찌르는 종류의 자극이며, 눈물이 찔끔대는 윤리의식의 혼돈이다. 그 형상들은 무엇인가 감상자를 가늠할 수 없는 이성의 영역 바깥으로 끄집어 내고 있었다. 이것은 은유가 갖는 의미의 과잉일까, 아니면 결핍일까? 아노말리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인간 혹은 영혼이 빠져나가 껍질뿐인 신체, 장기를 드러낸 신체 혹은 무뇌의 조악한 마네킹, 성징이 과도하게 드러난 남녀 혹은 양성구유의 히즈라(hijra), 안드로기니(androgyne) 아니면 사방지(士方智) 등등, 과잉이든 결핍이든 이들 모두 인간의 성적 본능을 은유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지나쳐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이라서 욕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당히 그 신체들은 절단되고, 고립되고, 좌절하면서도 끝없이 욕망한다. 그럼에도 그 신체는 잔인한 생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비극적으로 드러내면서, 암울하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린치를 당한 폭력의 희생물처럼 보이는 것도 피할 수 없다. 

 

정복수는 그가 그려내는 신체에 통상의 인체가 가진 미적 아름다움을 담을 생각은 애초에 없는 듯하다. 예컨대 그리스 토르소에서 발견되는 고졸한 격조 따위는 없다(정복수의 관점에서 그리스 조각들은 모두 임포텐츠이다). 그것은 의도된 것이다. `서양의 아류가 되느니, ... 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그림`, 말하자면 그에게 그림은 `똥과 같고`, `창자 속의 더러운 덩어리󰡑에 불과하고, `충혈된 눈, 지르고 싶은 소리, 뒤틀리는 손가락󰡓이 그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이다. 어눌하지만 확신에 찬 정복수의 언사다. 결국 그가 그려낸 것은 이런 의지와 편집증적 시각에 의해 뒤틀어진 신체이다. 신체라기보다는 성적 본능으로 기형을 무릅쓴 동물적 행태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림 속 인간의 신체는 인간의 형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형상을 갖춘 동물의 그 무엇인가와 더 흡사하다. 이런 점이 그의 작품을 독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그 단초란 인간의 욕망이 곧 동물의 수성이며, 반대로 동물적 욕망이 곧 우리 인간의 성적 욕망이라는 것이다. 자칫 모호할 수도 있지만 되짚어보면 명쾌한 결론일 수도 있다. 이런 의지로 그는 하드보드의 오돌토돌한 표면 위에, 단색의 캔버스 위에, 신체의 테두리를 오려낸 변형의 오브제에, 잡지에서 오려낸 듯한 인쇄물의 꼴라쥬 위에 사회적, 윤리적, 미학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상상한 것, 보고 싶은 것, 그리고 싶은 것, 다소 끔직하고 외설스럽기도 한 것을 끝내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그림에 대한 혐오성 짙은 애증과 떨쳐낼래야 떨쳐낼 수 없는 인간의 `수성(獸性)`을 묵시록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정복수는 주목 받고 있다. 소위 인간이란,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적자생존론에서부터 린 마굴리스의 세포공생 이론, 가이아 이론, 그리고 스티븐 굴드와 닐스 엘드리지의 단속평형설에 이르기까지 동물의 한 개체로서 진화의 산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마굴리스는 생물학자의 입장에서 주로 미생물의 진화와 성(sex)의 진화, 그리고 생명의 기원을 밝히고자 했다. 연구에 따르면 남자의 정자 속에는 세포핵 속의 염색체 DNA와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분열과 번식을 수행하는 미토콘드리아 DNA가 들어있지 않아 여성의 난자 속에 들어 있는 미토콘드리아만이 후세에 전달되기 때문에 특별히 번식을 위한 행위를 하게 되는데 이를 성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인류가 한 이브의 자손이라는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설의 명제는 바로 이런 미토콘드리아 분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마굴리스는 성은 곧 죽음을 의미하며 성의 진화는 악마와의 거래였다고 단언한다. 

 

생물의 진화과정에서 생물들은 번식을 위해 성을 수행하는 대신 죽음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이도록 강요 당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성을 통해 쾌락을 얻는만큼 죽음이라는 희생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성이 악마와의 거래라는 그녀의 주장은 절묘하다. 이는 진화생물학자 관점에서의 의견이지만 그리스 이래 서양철학과 심리학의 주요 명제 중 하나인 에로스와 타나토스 이론과 많이 닮아 있다. 이 두 요소는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산물로 여겨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에로스는 삶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이를 통해 생의 의욕을 다지는 충동이고, 타나토스는 죽음의 본능, 즉 말 그대로 파괴본능으로서 일체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충동적 힘이다. 이는 종종 예술의 모티브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켈트인의 옛 전설을 기반으로 악극화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 오페라의 2막에서 연인들의 밀회와 희열이 이중창으로 표현되는데, 그 희열과 절정의 순간에 트리스탄은 󰡒사랑의 밤이여,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잊게 해다오󰡓 라고 느닷없이 외친다. 이 외침 역시 사랑과 죽음이 교합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섹스와 죽음의 동시적 결합`이라는 유명한 공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죽하면 그럴까 싶지만, 왜 인간은 희열의 순간에 죽음까지 파고드는 사랑에 집착하는가? 프로이트에 따르자면 인간은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마음 저편에는 끊임없이 죽음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인간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 명제로 취급되어 왔다. 까닭에 사랑과 죽음에 관한 논의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된다. 

정복수의 작품을 논하면서 이렇듯 장수사를 늘어놓는 것은 그의 작품 또한 이런 일단의 의식을 엿볼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구의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개념에 작가가 동의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정복수 작품의 기조는 정신과 육체, 사랑과 죽음의 충동, 작품과 관객은 대응내지는 서로 󰡐응시󰡑하고 있는 상호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이러한 응시의 구도에 전착하면서 예기치 않은 접촉과 충돌을 시도하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이러한 응시의 구도에 전착하면서 예기치 않은 접촉과 충돌을 시도 하기도 한다. 즉 관객이 그의 작품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실제로는 감상자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인성과 수성, 에로스와 타나토스, 응시자와 피응시물의 관계가 상호 얽혀있는 것으로서 상정하고, 말하자면 응시하면서 응시 당하는 길항관계를 그의 작품 안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응시는 존 버거(John Berger)와 미쉘 푸코(Michel Foucault)류의 응시와는 그궤를 달리 한다. 그의 응시란 성별화되거나 권력구조 관계의 시각화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응시와 응시 대상의 교차를 통해 상호 수렴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오히려 중성적이다(푸코는 본다는 것은 절대 중성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관음적인 시선조차 성별이나 주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과 몸, 작품과 관객의 위계에 대한 문제이다. 

 

일례로 79년과 83년의 바닥화에서 실행되는 퍼포먼스에서 관객과 작품의 위계를 실험하고 있다. 관객이 그림을 밟고 지나가면서 작가의 영혼(작품)과 관객(몸)의 이분법이 사라진다. 여기서 밟는다는 행위는 응시의 또 다른 형태이며, 누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위계 또한 와해되고 있다. 까닭에 정복수의 신체는 오늘날의 인간-털 없는 원숭이가 직면하고 있는 존재론적 상황을 넘어 생명․유전공학과 사회문화 지형도에 따른 정체성에 대해 던지는 물음이자, 동시에 관객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 반성적 감성을 그림에 투사시키고자 하는것이다. 이를테면 감상자의 망막은 난폭한 도살자의 행위를 추적하면서 은연중 추적당하게 된다. 그림과 감상자는 추적하면서 추적당하는 상호관계 속에서 신체가 가죽이 벗겨지고 사지가 잘리고 훼손되는 것을 응시하게 된다. 

 

감상자는 이 추적의 과정에서 신체를 낱낱이 도려내 해부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잠재하는 야수와 같은 맹렬함과 이성의 통제아래 인간적 역겨움과 수치심을 발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적 본능에 휘둘리는 동물일 수도 허울뿐인 휴머니즘을 가진 인간일 수도, 아니면 그 둘 다에 속할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빠지게 만든다. 여기서 관객은 인간의 난폭한 천성을, 동시에 한계에 맞닥뜨린 인간성을 감지한다(종국에는 자신도 한때 동물이었음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따라서 관객이 정복수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그의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은 바로 그것들, 작가의 감성과 분리할 수 없는 그것들이다. 인간은 늘 이성과 감성, 인성과 수성, 삶과 죽음 그리고 그 틈에서 생겨나는 인식의 차이에 대해 고민해왔다. 몸을 인식하고자 할 때 영혼의 관점에 의존하는 것도 마찬가지 경우에 속한다. 몸에 대한 정체성을 말할 때조차 정신의 존엄성을 통해 몸을 이해하고 해석한다. 이는 다른 말로 몸의 인식 자체가 지극히 상대적이며, 그렇게 상대적인 만큼 몸은 정신에 의해 그 위상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몸과 영혼, 인성과 수성이 갈리는 임계점에 대해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의 판단은 학습과 경험에 의존하게 되고, 그조차 지극히 인위적이어서 늘 오류와 편견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정복수의 몸은 유보적이다. 이성 중심사회에서 발견되는 사랑(정신)과 성(몸)의 이중윤리 역시 유보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성적 본능에 이끌리는 인간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만 읽힐 수는 없다. 동물적 본능에 대한 인간성의 억압구조를 문제시하는 정복수는 󰡐그것들은 분리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위계 관계는 진리인가, 인간 내면의 동물적인 성적 본능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야만 하는가󰡑라는 문제 자체에 의문 부호를 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 이래로 인간의 이미지는 매우 복잡한 그 무엇이겠지만, 정복수가 그려내는 신체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도 속하지 않는 무연고의 벌거벗은 몸이기에 식별할 수 있는 역사가 없는 몸이다. 이 몸은 동물적인 본능에만 충실한 시각 이미지만을 전하면서 오직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특성만을 지닌다. 따라서 그리는 방식과 개념이 그림의 형식보다 중요해졌다. 그의 신체는 텅빈 배경에 위치하거나 단색의 화면 속에서 고립하는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그려진 신체의 위상을 식별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탈각시켜 익명화하는 의도이기도 하지만 고립된 만큼 그 욕구가 더 절실해지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해석 가능성으로는 성의 욕망과 죽음은 합리적 사고를 넘어서서, 그 본능과 충동 이외에는 모두 망각되어 그 무엇도 인지할 수 없는 본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신체들이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욕망의 사각지대가 없다는 뜻도 된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의 말대로 󰡐영원히 고독한 인간의 심리 지도󰡑를 구체화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런 격리의 방식을 통해 정복수의 그림이 소환하는 것은 신체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것은 망령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를 괴롭히고, 갈망하게 하고, 현혹하고,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가슴을 애타게 하는 답답함으로 신체와 장기 일부분을 쥐어짜게 만들기도 했던 추억 같은 것들이다. 

 

작가는 <몸의 추억, 1997>, <인생의 일기, 2004>, <혀의 추억, 2005>, <내장의 추억, 2010> 등의 작품에서 이기억들을 되살리고자 한다. 그렇더라도 정작 정복수가 묘사하는 것은 우리가 보고 느꼈던 경험을 초월하는 숨겨진 욕망의 어떤 표정들이다. 분명 그것은 실체가 아닌 눈 위에 남겨진 발자국처럼 욕망의 신체가 타버리고 남긴 불길한 흔적이거나 욕망의 화신으로 환유된 고기 덩어리의 신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우리는 이런 흔적과 고기 덩어리의 다양한 묘사에 놀라고 당황해 하는 것이다. 여기서 벌거벗은 몸은 일방적 응시에 대상이 아닌 상호응시의 대상물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포르노그라피와 예술의 경계를 탐색하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그의 신체는 윤리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인간 내면에 숨은 동물적 야만성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 역시 80년대 한 작품에서 󰡐사람은 사람이 죽이기 마련이지요󰡑라는 낙서 같은 글귀를 통해 이 포악스런 맹렬함이 동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자 했다. 비극적이면서도 암울한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 도구적 동물내지는 지덕체를 고루 갖춘 󰡐호모 사피엔스󰡑의 이념 등의 달콤한 자장가로 동물적 야만성을 잠재우고, 창작행위라고 자부하는 인간 고유의 정신활동을 기반으로 직조된 의복을 걸치고서 스스로에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작위를 수여했다. 다소 과도한 위엄과 존엄으로 치장된 나름의 독자적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다. 나아가 인간은 반인반수에서 반인반신의 존재로 격상되는 착각에 이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착각은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인간에게 학습되고 강요된 이상으로서 암묵적으로 건드려서는 안될 금기에 속한다. 

 

이쯤에서 정복수는 반기를 든다. 이 허위와 기만으로 직조된 인간의 의복을 거침없이 벗겨내고, 까발리고, 그 신체마저도 해부함으로써 금기를 파열시키고자 한다. 그가 그려내는 신체들은 숨을 곳도 숨길 것도 없는 알몸으로 화면 위에 포착되면서 희열과 고통이 뒤섞이는 외설적인 신음을 내지른다. 이 신음이란 모든 것을 벗어 던진 해방의 신음이요, 더욱 욕망하라고 부추기는 충동질의 신음이자 죽음에 다다르는 놀이의 신음이다. 

 

특히 그가 그려낸 신체는 묘사된 것 이상으로 은유적이며, 비의적으로 어렴풋이 얼굴에 나타난 미소의 의미, 또 그런 만큼 어찌 보면 끔찍한 느낌을 주는 기묘한 형상과 바로 그 기형이 자아내는 음울한 분위기는 <집착과 죽음>, <욕망의 교향곡>, <기쁨의 원형>, <인간의 기쁨>이라는 제목 등과 맞물리면서 불길한 느낌의 신음을 최대한 증폭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의 알몸은 `인습의 허위에 저항하는 육체, 위험하고 전복적인 육체`이지만, 그 저항과 전복은 단순히 극단적 수사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격렬하게 포용해야만 하는 아이러니의 신체이기도 하다. 

 

정복수는 묘사방법 만큼이나 즉물적인 이미지를 통해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역동적인 수성의 긍정적 에네르기를 살려낸다. 허위의 탈을 쓴 존엄과 위엄의 이면에서 행해지는 수성일지라도, 떨쳐내야 할 수성이 아니라 감싸 안아야 할 인간적 에네르기로써 말이다. 따라서 그의 신체는 인간성의 관점에서 판에 박힌 형식을 상투화하여 미학적 진실인양 강요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요컨대 그에게 있어 인간의 신체는 여태까지 제대로 충분히 표상되거나 재현되지 못했다. 이전의 신체들은 가식적이거나 구습에 물들었거나 작가의 직무태만에 기인하는 산물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확실히 통속적이고 숨김이 없으면서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의 그림, 그러니까 피비린내가 나더라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인간을 연상하고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은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려내는 신체가 진정으로 인간의 내면에 똬리를 튼 성적 본능의 본질을 구현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그의 그림이 인간의 성적 본능을 조장하는 것인지, 전복시키자는 것이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되묻는다. 당신은 이렇게 아귀나 축생처럼 다뤄지는 신체를 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원색적으로 성욕을 토로하는 신체를 본적이 있는가? 여기에 그런 신체들이 있다. 서너개의 머리를 가진 샴쌍둥이 같은 신체, 단지 종족번식의 도구로써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계도로 축약된 머리들, 생명의 존재 이유인양 내장과 생식기만을 유지한 오체불만족의 신체, 유혹과 여성성기로 상징화 된 요염한 입술을 전신 여기저기에 꼴라주한 신체, 관음증의 눈을 훈장처럼 곳곳에 달고 있는 신체, 몸통의 촉수란 촉수는 모두 남성 성기로 변태한 욕망의 신체 등등이 그것이다. 또한 표범가죽 같은 신체가 사나운 짐승처럼 음험하게 날뛰는가 하면, 사지가 잘려 피가 솟구치면서도 성적 희열의 점액질을 사방으로 뿜어대는 신체가 있다. 

 

게다가 주변에는 남자의 생식기가 총알처럼 여성의 음부를 찾듯이 종횡으로 날아다닌다. 여기서 남자는 3개의 다리를 가진 과잉의 신체이고, 여자는 구멍 뚫린 결핍의 신체일 뿐이다. 따라서 남자의 생식기는 과잉을 뽐내면서 분절하여 화면을 가득 채우고, 여자의 음부는 구걸하듯 결핍의 구멍을 활짝 벌리고 있다. 

 

이는 마치 인간의 정체성을 전복시키려는 과대망상 내지는, 인간 내면의 비릿함을 비틀고 유희화하여 진실의 영역을 도전적으로 확보하려는 도살자적 태도로 그려진 의사해부학(擬似解剖學)적 도상이다. 일반적으로 성적인 육체의 감수성은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어서 사랑, 감정, 출산, 낭만 등으로 포장한 사회적 이미지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현실의 이면에서는 주체할 수 없이 비열한 욕망의 이빨을 드러내는 야만성이 공존한다. 그럼에도 정복수는 후자의 측면만을 포착하려는 태도를 고집한다. 이런 태도는 인간의 영혼, 이성, 휴머니즘, 존엄이라는 인문학적 수사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아브젝트(abject)를 폭로하는 방법론이다. 

 

본질적인 것, 본능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정신을 이루는 물적 토대인 몸의 분비물, 즉 오물, 정액, 체액, 양수, 시신 등의 아브젝트는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실상 창자에 가득 찬 오물은 우리를 살찌우고 살아가게 하는 자양분의 퇴적물이라는 사실을 잊지는 말자. 또한 양수 없는 자궁은 불임의 징후가 아니었던가. 

 

작가는 이것들을 적극적으로 거론하고 끄집어낸다. 문화비평적으로 이 아브젝트는 인간의 삶과 문화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배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겨운 느낌을 주면서도 마음을 부추기고 홀리는 기묘함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정복수는 이런 표현방식이 반드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삶의 진정성과 존재의 가치를 말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다는 식이다. 치열하게 짓이겨지고 파편화된 신체의 모습이야말로 삶의 이면, 존재의 이면을 성찰하고자 할 때 가장 강력한 전략적 기제가 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거론하기는 했지만, 그의 그림은 회화의 전통을 빌리거나 복원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몸의 담론인 󰡐포스트 신체󰡑, 즉 불안하고 변태적이며 동물적 잔인성으로 점철된 충격적인 신체에 가깝다. 머리와 손발이 몸통에서 잘리거나, 기묘하게 왜곡된 기형의 신체를 통해 내재된 폭력성과 파편화된 감정을 폭로하는 것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해서 더더욱 그렇다. 틀에 박힌 미학적 구조를 뒤로 하고 이전의 표현방식과는 거리를 두는 듯한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회화작품과 오브제나 설치를 이용한 작품에서 이러한 징후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화면에 그려진 인체의 얼굴에 오브제 가면을 덧씌운 작품 <사람의 머리>와 <대화의 기술>에서는 실제로 사고로 인해 얼굴의 일부가 심하게 망실된 환자가 타인의 얼굴가죽으로 안면이식수술을 한 사건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가식이나 위장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이며, 예술적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점에서 가히 충격적이다. <만남>에서는 잘려나간 신체의 자유스런 조합을 통해 프랑켄스타인의 부활을 목격하기도 한다. 

 

여기서 신체는 잘려나가기도 하지만 주체여부를 막론하고 자유롭게 봉합될 수 있는 신체의 일부가 된다. 이는 분명히 본능에 대한 명확한 언어적 진술이 성립할 수 없기에 편견의 덩어리에 불과한 신체가 타자와의 봉합을 통해 외부와 동일시하려는 욕망을 가시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곧 이 욕망은 통합적이라는 의미작용의 체계에 의해 흡수되면서 좌절하고 만다.

 

키치적인 조화와 조악한 장난감 인형으로 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작품들에서는 타자를 의식한 과도한 자기포장의 심리와 거기서 연원하는 불안과 동요를 불식시키려는 현대인의 역전 심리를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가 회화를 다루는 방식과는 다소 거리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너무 급하게 진보했거나 확장된 것이 아닐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존재`에서 참수당한 듯한 머리는 마치 경배의 대상처럼 토템화되어 있다. 그가 천착하는 성적 욕망과 죽음의 이미지는 결국 외경으로 이어지면서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경이롭게 변태하는 과정이 되고 있다. 약속의 징표로 쓰이는 새끼손가락이 잘려 피를 흘리는 손을 `승리자의 손`으로 제시하는 작품에서는 건조한 위트를 내보인다. 아마도 그 손의 주인은 정당한 싸움에서 다친 영광스런 상처의 주인공이 아니라, 타인과의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성공에 다다른 현대인의 초상이 아닐까 싶다. 묘한 뉘앙스가 연속된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끔찍하고 절망적인 이미지들이 지향하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삶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진정한 역설이다.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는 요인들을 포착하여 규명하는데 있어 정설보다 설득력에서 있어 훨씬 전략적인 방법이다. 예컨대 우리가 다뤄왔던 삶과 죽음, 이성과 감성, 인간성과 수성, 소외와 자기애, 사랑과 성…… 하긴 인간사와 무관한 개념이 어디 있으랴 마는. 어찌 됐든, 공인된 독사(doxa)를 앞에 두고 풀어내는 가멸찬 파라독사(para-doxa)다. 

 

이 역설의 그림을 통해 생산을 위한 생식기이든 쾌락을 위한 성기이든, 얇게 도포된 껍질뿐이든 오물로 가득찬 몸이든, 정복수는 다소 거칠더라도 기꺼이 포용하는 것이다. 포용은 포용이되 유보된 포용으로서 말이다. 이 유보는 관객에게 남겨진 몫이기도하다. 정복수의 작품 속에서 정신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정한 실존의 조건이 되어 관객을 향해 날아온다. 그리고는 이내 관객의 폐부를 찌른다. 애달프다. 그렇게라도 살고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의 고귀한 신체 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들이 서글플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찌르는` 정복수의 그림이 안겨주는 소중한 덕목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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